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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뉴스

삼국시대 축조된, 인천 ‘계양산성’ 사적 지정!

by 경초 2020.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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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공보뉴스/인천광역본부] 김영환 기자

통일신라시대때 주로 사용,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활용, ‘축성기술 변천’에 중요한 자료.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한강 유역의 교두보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인천시 계양산에 있는 계양산성을 관할 계양구에서 2016년 7월 문화재청에 사적 지정을 신청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현지 조사를 한 문화재위원들은 "성을 처음 쌓은 시기와 주체 세력에 대한 근거가 부족하다"거나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원형이 심하게 훼손됐다"고 지적됨에 따라 문화재위원회에서 네 차례에 걸쳐 지정 보류된 끝에 드디어 계양산성이 문화재청으로부터 사적 지정이 예고되었으며 어제 18일 문화재청의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와 계양구에 의하면 최근, 인천시기념물인 계양산성에 대한 사적 지정 안건을 검토하여 가결했다고 밝혔다.

해당 계양산성은 인천시 계양구 계산동에 있는 계양산 주봉(主峯)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봉우리에 자리한 유적으로, 둘레는 1천184m로 삼국시대에 조성한 이후 통일신라시대에 주로 사용하였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활용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용도는 군사 거점이자 행정 중심지로 판단되는 역사적 특징으로 인해 ‘축성기술의 변천’을 알려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조선시대 문헌인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증보문헌비고' 등에 계양산 고성은 석축(石築·돌로 쌓음)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조선 사대부 오희문이 쓴 일기인 '쇄미록'을 보게 되면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선봉장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아끼던 장수 가운데 하나였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곳에 주둔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대에 들어서 계양산성은 상당기간 동안 공동묘지로 사용되어 왔고 현재, 성벽은 80% 이상 유실된 상태로 잔존 성벽의 최대 높이는 7m로, 10차례에 걸친 학술조사를 통해 문터, 치성(雉城·성벽 바깥에 돌출한 구조물), 집수시설, 건물터 등이 확인되었으며 유물은 백제 한성도읍기 목간(木簡)과 항아리, 통일신라시대 대표 토기로 알려진 인화문(印花紋·찍은 무늬) 토기, 화살촉·자물쇠·쇠솥·덩이쇠 등이 출토되었다.

이번 계양산성의 사적 지정에 대해 문화재청 관계자는 "계양산성은 지정학적으로도 중요할 뿐 아니라, 학술과 문화재로써의 가치가 높아 역사교육의 장으로 충분히 활용될 수 있다"며 "오는 23일 지정 예고하게 되면 각계 의견을 수렴한 뒤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사적 지정 여부를 확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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